간추린 121년사

교통의 요충지였던 죽산군

죽산지역은 조선과 구한말 한양과 경상도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 였다. 1900년 당시 2만여명의 인구가 살고 있었다.

1897년 죽산에 복음이들어오다

죽산지방에 복음이 뿌려진 시기는 1897년 전후이다.

"경기도 남쪽에 교회가 시작된 지 5년이 되었다(1897년)"
[그리스도신문 1902년 2월 20일]

1901.3.2 죽산교회 창립하다

1901.3.2 죽산교회 창립이 역사에 공식적으로 기재됨

죽산 둔병리에서 마을의 12가구 초옥 중 10가구가 예수를 믿었고 이곳에서 '죽산 둔병리(죽주산성 아래 미륵당이 있던 둔병리-지금의 매산리 비석거리로 추정) 사경회에서 (죽산교회를 지칭하는 것으로 추론됨)'가 민노아 선교사의 인도로 개최되었다.

민노아 목사는 이곳에서 마가복음 교회 규모와 찬미요를 가르쳤으며

경기지역을 돌고 그 후 충북지역으로 건너가 37년간 여러 교회를 세우며 전도에 힘썼다.

충북 신대교회의 발원지 - 죽산교회

충북지역 신대리에 살던 오천보, 문성심, 오삼근 등은 농한기에 서울을 오가며 행상을 하던 중, 경기 죽산의 ‘둠벙리교회’에서 열린 사경회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자발적으로 예수를 믿기로 하였다. 이들은 마을로 돌아와 전도하며 주막을 빌려 흰 광목에 십자가와 태극기를 그려 놓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 때가 1900년 10월 3일, 충북 최초의 교회인 신대교회의 시작으로 본다. 당시 성경지식이 없던 터라, 뱃노래에 성경내용을 인용하여 찬송가로 부르기도 하고 막걸리도 마시며 유래 없는 주막교회가 시작되었다."

§ [출처] 충청 최초 교회 신대교회|작성자 석응재 재균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때에도 야학을 운영하며 민족교육에 앞장서다.

일제강점기, 주권을 잃은 나라에서 교회는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이었다. 신사참배문제는 결과적으로 선교사들이 하던 일을 놓고 본국으로 떠나게 했으며 200여개의 교회가 문을 닫았고, 2000여명의 신도가 투옥되고 50여명의 순교자를 내게 되었다.

죽산교회도 어려움을 피해갈 순 없었다.

그러나 어려운 시국에도 죽산교회는 경기 남부와 용인 등의 선교 거점이 됐다. 1930년 10월 19일 동아일보는 ‘죽산 시장에 있는 장로교회에서는 금춘부터 무산아동을 위하야 야학부를 설치하고…남녀학생이 50여명이라 한다’고 보도할 만큼 문맹 퇴치와 교육사업에도 열심이었다. 30년대 말 교인 수는 85명(경기노회 회의록)이었다. 

그러나 죽산 3·1운동 만세 여파 이후 일제의 교회 탄압, 전래 종교의 강세로 교회가 위축됐다. 그리고 전쟁 이후 농촌 인구의 급격한 감소로 정체의 길을 걸었다. 

[출처] 기도하는 어머니들의 안성죽산교회|작성자 성경환목사

열렬했던 죽산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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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지역의 독립만세 운동은 안성읍보다 더욱 열열했다. 이죽면 죽산리에 사는 문재홍이 4월 2일 죽산 시장에서 시장에 모여든 군중을 주도하여 만세시위를 벌이니 참가 인원이 약 1,000명 이었다. ...... (중략)

§ 한국기독교장로회 안성제일교회 80년사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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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이후 죽산교회 - 회복운동

암울한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초가를 올린 몇 칸 안되는 예배당은 꺼져가는 신앙의 불길을 이어가는 유일한 장소였다. 해방 후에도 정국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공산주의자들이 준동하여 몇번의 지소습격사건이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적인 집회도 있었다.

그러나 죽산교회는 구국을 위한 기도를 독려하며 여러차례의 부흥사경회를 열며 교회회복운동에 최선을 다했다. 

6.25 전쟁 속 죽산교회

6.25전쟁은 한국 어느 지역에서나 발생했던 비극으로 죽산지역도 예외일 수 없었다. 죽산지역에서도 집단학살이 감행되었고, 1.4 후퇴시 사람들은 피난을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미국교회가 한국교회를 향해 구제품을 보내어 주는 등 따뜻한 후원의 손길이 이어졌다. 

신사참배 터 위에 교회가 세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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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예배당은 우상을 물리치고 헌당됐다. 1953년 영수 정원재 장로 등은 일제강점기 신사 터였던 현 교회 터에 예배당을 건축했다. 죽산리 구 예배당이 미군의 폭격(한국전쟁) 여파로 금이 가고 유리창이 파손되는 등 붕괴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늘어난 교인을 다 수용하기에도 좁았다. 그들은 면사무소에 몇 번의 소청 끝에 건축 허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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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2993708&code=23111613&cp=nv"

[옛 죽산 신사터가 현재 죽산교회]

경제발전과 더불어 발전한 죽산교회(1970~80년대)

새마을 운동이 전개되면서 잘살아보세라는 구호와 함께 한국이 산업화가 이루어진 때였다.

1978년 예배당을 다시 지어야 한다는 교인들의 공감대와 기도를 통해 1978.3.13 예배당을 완공하였다.

또한 이 때에 개척교회를 세우는 운동이 전개되었던 때이므로 1979년 12월 19일 '매산교회'를 개척하였다.

내부 어려움을 딛고 도약하는 죽산교회(1990-)

여러 목회자를 거치며  내부 갈등으로 공동체에 깊은 상처가 남았지만,
다시금 조직을 재정비하고 기도운동과 일꾼세우기를 통하여 교회는 차츰 안정화되어가기 시작하였다.

2015.3.1. 성도들의 기도와 후원으로 새성전을 건축하여 입당예배를 드림으로 오늘날의 죽산교회는 역사속에 계속 이어져 가고 있다.